미래를 향한 아주 오래된 길

화가 많은 사람 - 화는 왜 나는가? 본문

청태만상

화가 많은 사람 - 화는 왜 나는가?

오늘부터 블로거 2021. 2. 25. 03:21
반응형

화의 감정은 결국 주관적이다

 

사람마다 화를 내게 되는 지점이 있다.

 

주변 사람들이 '그래, 그건 화를 낼만 해'라고 공감하는 상황들도 있고,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설령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그 반응의 정도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 '객관성'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이유로 심리학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만 객관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걸 두고 '통주관적'이라고 칭하게 되었을 거라 짐작한다.

 

화는 나에게 손해다

 

화를 내거나 욱하는 건 나에게 손해를 끼칠 때가 많다. 시간이 지나 화가 가라앉은 다음 돌이켜보면 '그때 그렇게 하지 말 걸'하고 후회도 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상황이 주어지면 열에 아홉은 다시 화를 낸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에 실을 묶고 실을 올리면 자동으로 팔을 올리는 것처럼, 같은 자극이 주어지면 같은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알면서도 다시 화를 내고, 후회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렇게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이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숙제일 것이다.

 

이를 멈추고 싶다면 왜 화가 나는지 그 원인에 대해 깊이 탐구해야 한다. 이때 화 내는 원인을 '주관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주관점 관점이라 함은 '사람은 누구나 또는 대부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은 잠시 내려두고, 설령 그 상황이 누구나 화를 냈을 법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결국 화를 내는 주체가 '나'라는 점에 주목하여 왜 '나는' 그 상황에서 화가 났을까를 살펴보는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그렇지 않나'하는 생각은 대개 성찰보다는 합리화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화는 왜 나는가?

 

화가 나는 원인을 살펴보면 결국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생각 때문이다. 여기서 '너'는 상대방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상황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화가 날 때도 '내가 원하는 방향', 즉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되지 않음에 화가 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려면 '정말 나는 옳은가, 내 생각이 옳은가'를 깊이 탐구해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에 대해서 정말 이 세상 그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단언컨대 당신은 옳다. 만약 이 경우라면 (내 응원이 무슨 큰 힘이 되겠냐만) 적어도 나는 적극적으로 당신을 응원하고 당신이 화를 내는 것에 대해 지지해 줄 의사가 있다. 따라서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에 대해 화가 나거나 어떤 상황에 대해 화가 난다면 꼭 '내가 옳다'는 근거를 찾아보길 권한다. 그리고 이 부분은 대충 넘어가지 말고 끝을 봐야 한다.

 

필자는 자신이 옳다는 객관적 근거를 결국 찾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데, 필자 역시 논증하고 주장에 대한 근거 찾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화가 나는 상황에 대해 집요하게 나의 옳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끝에 이르니 근거가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논리 중 하나는 '다른 사람도 다 그러지 않나'인데, 위에 언급했듯이 다수의 생각이나 의견은 진리나 진실에 대한 논거로써는 충분치 않다. 단적인 예로 세상 사람 모두가 지구는 평평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고, 지구 주변을 태양이 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즉, 75억 인구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의 객관적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니 다수의 의견이나 공감에 기초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내 생각 또는 의견이 사실 임을 입증해야 한다.

 

내 생각의 모순을 발견하려면 이 과정을 겪고 반드시 끝을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아집을 무너뜨리기는 힘들다.

 

 

원인 파악과 시정

 

물론 이렇게 원인을 파악한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화를 내는 습관이 고쳐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치는 건 더 어려운 과정일 수도 있다. 특히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 때문에 원인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처음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화를 낼 때마다 조금씩 그 모습을 알아차리고 화가 올라오는 그 순간 계속 감지하고 멈추려는 노력이 이어지면 차츰 나아진다. (이를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나의 생각에 모순이 있고, 내 착각에 의해 화가 일어난다는 인지가 꼭 필요하다.) 화를 낼 것 같으면 잠시 그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화의 기운이 가라앉고 나면 상황은 훨씬 작아져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길게 보면 원인을 알고 모르는 건 천지차이다.

 

 

내부적 원인과 외부적 원인

 

내 속에서 원인을 찾는 일을 하다보면 그 과정에서도 뭔가 분하고 '나만 성찰하고, 나만 반성하면 되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당연히 그렇지 않다. 모든 일에는 내부적 요인, 외부적 요인이 있기 마련이다. 또 살다보면 짜증나게 하는 인간들 한 둘은 꼭 있다. 그런 외부적 요인 역시 차분히 제거해 갈 필요가 있다. 다만 화를 내는 건 상황을 해결해주지 않으면서 내 감정만 상하고, 내 혈압만 오르고, 내 정신건강에 별 이익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를 바꾸는 것도 어렵고 남을 바꾸는 것은 더 어렵다. 그나마 둘 중 가능한 건 나를 바꾸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적 요인을 최대한 줄여서 상황을 개선한다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로 화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들에게 불교철학을 권한다. 여기서 말하는 건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수행과 마음 공부로서의 불교다. 필자는 약 10년 전에 접한 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도움을 받고 있다.

 

마음 공부: 내 안의 원인 찾기

 

짧게, 아는 만큼만 말하자면 우리가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불교에는 크게 세 가지 모습이 있다. 바로 종교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 수행/마음 공부로서의 불교다.

 

종교로서의 불교에는 믿음이 가장 중요한데, 자칫 복을 구하는 '기복'의 모습으로 빠지기가 쉽다. 물론 종교로서의 불교도 '제대로' 믿으면 진리로 나아가는 길이겠으나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바는 아니다.

 

철학으로서의 불교에는 사유가 중요하다. 이 세상은 어떠한지 철학적 탐구 체계로서의 불교인데, 이 역시도 진리로 나아가는 하나의 방편이나 생각에만 머물면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의해야 한다.

 

수행/마음 공부로서의 불교에는 실천이 가장 중요한데, 이 실천에 앞서 일정 정도의 믿음과 사유도 필요하다. 다만 여기서의 믿음은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그런 추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모든 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없애면 결과도 달라진다'는 이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다. 굳이 '철저한' 믿음이라 강조한 이유는 이 당연한 이치도 내 문제에 적용하려고 하면 생각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남의 눈에 든 티끌은 보여도 내 눈에 든 대들보는 못 본다고 했던가.)

 

또 실천 하기에 앞서 무엇이 원인인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게 화의 원인을 알아야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실천 방침이 나온다. 내 문제를 누가 대신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원인이 나에게 있으면 해결책도 나에게 있다. 다만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고, 나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연습과정에 대해 사람들은 100일, 300일, 1000일을 이야기한다. 필자의 경우 조금씩 감이 잡히기까지 4-5년 걸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오래 걸렸지만 그래도 그 뿌듯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니 당장 되지 않더라도 꾸준히 해나가기를 바란다.

 

도움 구하기

 

필자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보다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는 없지만 이런 공부를 접한 이후 삶이 많이 바뀌었고 아직도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래서 누군가 이런 문제로 고민을 하면 늘 마음 공부를 추천한다.

 

사실 어느 종교나 철학을 봐도 일정 정도 '마음 공부'의 요소가 있는 것 같다. 다만, 2,600년 전 오늘날 붓다라고 부르는 29살의 청년, 고타마 싯다르타가 삶의 고뇌에 대한 탐구를 시작으로 그 끝에서 발견한 이치가 불교 가르침의 뼈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마음 공부에 있어서는 긴 역사를 갖고 있고 탁월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싯다르타는 구도의 길을 나선 후 6년간의 고행과 수행을 하게 되고 마침내 이치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불교가 역사 속에서 변천하면서 우리에겐 마음 공부보다는 종교로서의 모습으로 많이 와닿기 때문에 필자 역시 처음에는 싯다르타가 설한 이야기가 우리 삶의 고뇌를 해결하고자 함이라는 점을 몰랐다. 그냥 부처나 보살 등 추상적인 존재들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핵심은 내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고 반응하는지에 대한 마음 공부다.

 

오늘날 마음 공부는 비단 불교 뿐만 아니라 정신과 상담, 심리학 상담, 철학 상담 등 여러가지 모습을 띤다. 어떤 루트를 선택하더라도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을 변화시켜 결과를 변화시킨다'는 본질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사성제와 탐진치 삼독

 

끝으로 이렇게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해가는 과정을 잘 녹아낸 불교 사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의 사성제(四聖諦)인데, 이 네 가지는 '고집멸도'를 의미한다.

 

첫째, 고성제는 괴로움이 괴로움인지를 아는 것이고,

둘째, 집성제는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고,

셋째, 멸성제는 그 괴로움의 원인을 멸하는 것이고,

넷째, 도성제는 그렇게 마음이 편안한 경지(道)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불교의 가르침 안에는 '탐진치 삼독'이라는 말이 있는데, 탐진치 즉 욕심내는 탐심(貪心), 화내는 진심(嗔心), 어리석은 치심(痴心) 이렇게 세 가지 마음이 사람에게 가장 큰 세 가지 독(三毒)이라는 의미다. 그만큼 화를 내는 마음이 사람에게 흔한 감정이고 동시에 독이 되는 감정이라는 말이다.

 

필자가 이 구절을 처음 접했을 때 '이렇게 화내는 마음을 없애야 하는 세 가지 중 하나로 규명했다면 이 사상 안에 반드시 그 해결 방법도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계기로 불교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시작하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주변에 잘 알려진 선사를 찾아가서 지혜를 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중 가르침이 나와 잘 맞는 정신적 스승을 만나고 나면 마음공부는 한결 수월해진다.

 

모쪼록 우리 모두가 진심을 이겨내고, 나아가 탐심과 치심도 버리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끝)

 

반응형